간략한 로마 이야기 2) 젊은 바실레이오스, 자주색 산실에서 태어난 바실레이오스 로마-비잔티움 이야기

내가 기억하고 있는 로마의 역사를 간단하게 정리해 보는 글. 















 위대한 마케도니아 왕조는 6대에 걸쳐 16명의 황제를 배출하였다. 마케도니아인 바실레이오스, 현자 레온, 콘스탄티노스 포르피로게니토스와 로마노스 레카페노스의 시대 동안 제국은 서서히 세를 불렸다.. 이제 제국 역사에 남을 군사지도자들이 황권을 잡자 제국은 급격히 팽창했다. 크레타와 알레포의 점령자 니케포로스, 스뱌토슬라프를 격파하고 팔레스티나까지 진격한 요안니스의 아래에서 그 유명한 클리바노포로스와 함께 제국군은 무적이 되었다.

 젊은 바실레이오스, 자주색 산실에서 태어난 바실레이오스라 불리던 청년에게 제국의 운명이 맡겨지기까지는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로마노스 2세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제국을 이어받아 영웅적인 시대를 이어나갈 것은 누가 보더라도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로마노스가 요절하면서 바실레이오스는 영광을 위해 기나긴 우회로를 걷지 않으면 안되었다. 

 처음 13년 동안 그는 단순한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요안니스가 사망하자 혈기 넘치는 성인이 된 바실레이오스는 아직도 그의 종조부인 대환관 바실레이오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당장 요안니스의 인척 바르다스 스클레로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바르다스 포카스의 도움으로 그를 제압하고 시간을 번 바실레이오스는 9년 지나 드디어 시종장 바실레이오스를 축출하고 제국의 실권을 손에 쥔다. 

 콘스탄티노플의 지배자가 된 것으로 바실레이오스의 시련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자신만만하게 불가리아로 진격한 바실레이오스는 트라야누스 문에서 쓰디쓴 패배를 맛보게 된다. 기나긴 불가리아와의 투쟁은 패배로 그 첫 장을 장식하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소아시아는 일전의 동지였던 바르다스 포카스, 바그다드에서 권토중래한 바르다스 스클레로스의 반란군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제국의 심장부가 반란군의 손에 들어간 상황에서 바실레이오스가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신의 도움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른다. 바다 건너 키예프에서 이름높은 바랑고이 부대가 루스의 개종과 함께 바실레이오스를 돕기 위해 찾아왔다. 이들의 힘으로 바실레이오스는 끝끝내 제국 전체를 다스리는 유일무이한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그가 선임황제가 될 최초의 정당한 기회로부터 26년이 지났다. 니케포로스, 요안니스, 시종장 바실레이오스, 바르다스 스클레로스,  불가리아의 사무엘, 바르다스 포카스와의 투쟁이 그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친 것일까. 천 오백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오직 그 혼자만이 결혼하지 않은 황제로 이름을 남기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에게는 친한 친구조차도 없었다. 뒤를 이을 가능성이 있는 것은 그의 세 조카딸이었지만, 둘째 조이의 혼담이 실패로 끝난 뒤 결국 다른 결혼 상대를 찾아주지 않은 것을 보면 그가 과연 그의 사후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생각하기도 힘들다. 

 바실레이오스의 속내는 어찌되었든, 그는 트라야누스의 문에서 패배를 당한 뒤 28년만에, 클레이돈 협곡에서 사무엘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한다. 기록을 믿는다면 그는 그 유명한 처벌을 불가리아인들에게 내렸다. 후대 사람들은 그로부터 그를 자주색 산실에서 태어난 바실레이오스, 젊은 바실레이오스라고 부르지 않고 불가리아인 학살자 바실레이오스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1025년 바실레이오스는 사망한다. 사람들은 그를 중세 로마의 정점을 달성한 황제로 기억하지만, 외적인 팽창에 가려진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무던히 노력한 황제가 그였다. 또한 그는 모든 로마 황제 중에서 가장 막강한 황권을 휘두른 자이기도 했다. 혹자는 말했다. "1025년 12월 15일 바실레이오스가 사망했다. 그 바로 다음 날, 비잔티움의 쇠퇴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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